한 가정에서 요리 담당이 정해지는 건 실력보다는 시간, 시간보다는 의욕에 달린 거라는 생각한다. 한때 이탈리안 레스토랑 주방에서 근무했던 아내는 파스타와 피자는 물론 잡채와 몇몇 밑반찬을 기가 막히게 잘 만들지만, 집에서 주로 요리를 하는 건 나다. 실력은 아내가 나아도 시간은 내가 더 많고, 요리를 해보겠다는 의욕도 내가 더 강하기 때문이다. 특히 내가 만든 음식을 아내가 맛있게 먹을 때, 정말 이 맛에 요리하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 만큼 뿌듯하다. 물론 나의 요리 경력이라고 해봤자 비공인 자취 짬밥뿐이다. 라면으로 시작해 찌개류를 하나씩 섭렵하고 이런저런 볶음 요리도 만들어 먹다 보니 할 줄 아는 것들이 꽤 늘었다. 여느 일처럼 요리도 섬세하게 파고들면 밑도 끝도 없겠지만 간이나 맞추자는 마음으로 임하면 얼핏 거기서 거기라는 판단이 들 때가 온다. 찌개에 들어가는 채소는 양파, 대파, 청양고추, 다진 마늘에다가 취향 따라 버섯, 애호박, 두부 정도. 된장 풀면 된장찌개, 고추장 풀면 고추장찌개, 김치와 고기를 넣으면 김치찌개가 된다. 쌀뜨물을 쓰면 맛이 조금 더 묵직해지는데 그래도 영 아쉬울 땐 조미료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개인적으로는 물에 진간장과 올리고당, 다진 마늘, 후추, 대파, 청양고추를 넣어 졸인 간장 양념을 좋아한다. 각종 고기에 잘 어울리는데 특히 닭고기와 찰떡궁합이다. 나는 요리할 때 딱히 정해둔 계량이 없다. 채소와 고기는 가능한 한 푸짐하게 넣고 간을 더하는 조미료는 눈대중으로 넣는다. 싱거우면 더 넣고, 짜면 물을 조금 부으면 되니까. 짠맛이 강하면 설탕이나 양파로 단맛을 더하고, 개운한 맛이 필요하면 식초를 몇 방울 떨어뜨린다. 국물에 얼큰함이 부족하면 다진 마늘과 청양고추와 매운 고춧가루를 적당히 푼다. 속되게 말해 임시변통, 좋게 포장하면 순발력 있게 감으로 요리를 해내는 편이다. 가끔 원하는 맛이 나오지 않아 당황스러울 때도 있지만 열에 여덟은 성공적이었다. 이 정도면 생활인으로서, 주부로서 나쁘지 않은 성적 아닌가. 노년에 처음 한글을 배운 충청도 할머니들이 쓴 『요리는 감이여』라는 요리책이 있다. 요리책이긴 해도 흔히 기대하는 레시피북과는 다르다. 수십 년 동안 감으로 요리해온 할머니들의 비법서… 계량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비법서… 사실상 요리 고수 할머니들끼리만 이해할 수 있는 그런 비법서인 셈이다. 예를 들면 1940년생 윤춘화 할머니의 꽈리고추 멸치볶음은 이렇게 만든다.
1. 꽈리고추를 씻어 맛소금, 왜간장 넣고 볶아.
2. 숨이 죽으면 멸치, 양파, 마늘을 넣고 볶아. 청주도 넣으면 비릿하지 않아 좋아.
3. 마지막으로 깨소금, 참기름 넣어.
참으로 간단해 보인다. 1956년생 정철임 할머니의 늙은 호박지짐이 만드는 법도 살펴보자. 1. 늙어 호박을 싹둑싹둑 썬다.
2. 껍데기를 칼로 까고 숨가락으로 안을 북북 긁어놓고
3. 밀가루와 물, 늙어 호박을 손으로 쪼몰쪼몰 반죽한다.
4. 소금과 설탕을 솔솔 넣는다.
5. 프라이팬에 약하게 익힌다.
늙은 호박이 ‘늙어 호박’이 되고 숟가락이 ‘숨가락’이 되어도 이해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다. 다만 한 가지 문제라면 계량도 단위도 전혀 없다는 것. 요리깨나 해본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겠지만 생판 처음 늙은 호박지짐이를 만드는 사람에게는 의아한 레시피일 수밖에. 그런데 참 신기한 건, 할머니들의 비법 레시피를 읽으면 침이 고인다는 거다. 재료를 어떻게 썰고 양념을 얼마나 넣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히 맛있을 거라는 모종의 확신이 든다. 할머니의 지난했던 삶에 대한 예우 때문만은 아니다. ‘할머니 손맛’이라는 막연한 환상 때문만도 아니고 딱히 내가 좋아하는 메뉴여서도 아니다. 없는 살림에 뭐라도 만들어 먹이려는 그 마음, 분명 진심이고 정성이었을 그 마음 때문이다. 그런 마음으로 만든 음식은 짜거나 싱거워도 한 그릇을 깨끗이 비우게 된다. 기꺼이 그러고 싶다. 늙은 호박지짐이를 만드는 정철임 할머니는 ‘삶’에 리을과 미음이 들어간다는 걸 한글을 배우며 처음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하물며 한글을 읽고 쓰지 못하던 시절의 요리에 계량이나 단위가 있었을 리 만무하다. 그래서 책 제목이기도 한 『요리는 감이여』는 그냥 하는 우스갯소리만은 아니다. 알려주는 이 하나 없고, 한글도 읽을 수 없는 상황에서 가족을 위해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야 했던 날들. 그 시절에 할머니들이 의지할 데라고는 혀에 느껴지는 간과 자기 감뿐이었을 테다. 그건 절실한 일상이고 지극한 사랑의 표현이기도 했을 것이다. 사랑에는 단위가 없다. 얼마나 정교한지 측정할 수 없고 얼마나 크고 무거운지 가늠할 방법도 없다. 다만 각자의 삶에서 각자의 최선으로 농도를 더할 뿐이다. 수십 년에 걸쳐 축적된 할머니들의 요리에 비하면 내 요리는 애들 소꿉장난 수준이겠지만, 나도 나름의 최선을 다하기로 한다. 계량도 없고 단위도 없지만 정성만은 가득하길 바라면서. 요만큼이 딱 좋다며 칼같이 걷어내는 대신 재료를 아끼지 않고 듬뿍 담아낸다. 간은 차차 맞추면 되니까. 줄 수 있을 때, 줄 수 있는 만큼 듬뿍 주는 것. 음식도 사랑도 그렇게 해야 맛이 좋다.
* 바트의 책장은 글 쓰는 바트가 읽은 책의 내용을 소재로 한 서평 에세이입니다.
책 내용을 그대로 요약하는 서평이 아닙니다.
* 이 글은 창비교육 출판사에서 출간한 책을 읽고 쓴 서평 에세이입니다.
책에는 위에 언급한 윤춘화, 정철임 할머님 말고도 더 많은 레시피(!?)가 담겨 있으니, 읽어보시고 맛깔난 저녁 되세요!
'바트의 맞춤법 공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직 국어강사의 맞춤법 공부) -든지 vs -던지, 둘 다 맞다고? (1) | 2024.05.30 |
---|---|
전직 국어강사의 맞춤법 공부) 붙이다 vs 부치다, 둘 다 맞다고? (0) | 2024.05.29 |
마루야마 겐지 <취미 있는 인생> - 목청껏 소리 내는 시간 (0) | 2022.05.23 |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 훗날에도 반가운 문장 (0) | 2022.05.18 |
무라카미 하루키 <상실의 시대> - 오이를 아작아작 (0) | 2022.05.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