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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트의 맞춤법 공부

무라카미 하루키 <상실의 시대> - 오이를 아작아작

by 김바트 2022. 5.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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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타가 인정하는 편식왕이다.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나의 편식 리스트를 대강 읊어보면 내장류, 날 것, 해조류, 버섯류 등을 거의 먹지 않는다. 그러니까 곱창, 막창, 대창, 간, 천엽, 닭발 등등은 물론이고 회, 육회, 초밥도 먹지 않는 것이다. 나는 익힌 고기와 생선, 면과 빵과 떡을 좋아한다. 이렇게나 식성이 편협한 와중에 다행스러운 건, 뭐든 쉽게 질려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몇 안 되는 좋아하는 음식을 오래오래 좋아하며 먹어왔다. 그 덕에 <이까짓, 민트초코>라는 편식 에세이도 출간했다. 그런 내가 오이를 먹을 줄 알고, 심지어 꽤 좋아한다는 사실에 아름이도 처음엔 의외라는 반응이었다. 결혼 전, 돼지국밥 가게에서 기본 찬으로 나온 오이를 먹고 있으니까 아름이는 “편식이 그렇게 심하면서 오이는 왜 먹어?”라고 물었다. 왜냐니, 맛있으니까 먹지. 나 같은 편식왕은 오이나 가지처럼 호불호가 극명한 채소는 당연히 먹지 않을 거라고 넘겨짚은 것이다. 물론 입장을 바꿔 생각하면 이해가 된다. 나도 뭐든 잘 먹는 아름이가 하필 오이만은 먹지 않는다는 사실이 놀라웠으니까. 껍질을 벗겨 큼직하게 썬 오이는 쌈장에 푹 찍어 먹는 맛이 좋다. 가득 머금은 수분 덕에 씹을 때마다 텁텁한 입안이 해갈되는 기분이 든다. 밋밋한 가운데 스멀스멀 올라오는 오이 특유의 향은 쌈장의 강한 맛과 잘 어울린다. 짜장면 위 가지런히 채 썬 오이는 느끼한 기름기를 잡아주고, 밀면이나 냉면 위 채 썬 오이는 부드러운 면과 어우러져 식감을 다채롭게 해준다. 오이소박이는 아무리 맵고 짜도 뒷맛이 개운해서, 밥반찬은 물론 밤참으로도 좋다. 특히 오이에 애정을 갖게 된 계기가 따로 있다. 중학생 때부터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을 좋아했는데, 독서의 편식도 심한 편이라 마음에 드는 책만 여러 번 읽곤 했다. 그중에서도 『상실의 시대』는 중학교 3학년 때 처음 읽기 시작해 이십 대 중반이 될 때까지 10번도 넘게 읽은, 그야말로 내 청춘의 책이다. 주인공인 와타나베는 마음속에 나오코에 대한 그리움과 책임감을 지닌 채로 미도리라는 여자와 ‘썸’ 비슷한 관계를 이어간다. 미도리는 동네의 다른 집에 불이 났을 때 옥상에서 기타를 치며 자작곡을 부르는, 감당하기 힘들 만큼 엉뚱하고 발랄한 여자다. 그녀는 지난 연애와 가정사로 나름의 상처를 지닌 인물이기도 한데 그 상처 중 하나인 그녀의 아버지는 뇌종양으로 대학 병원에 입원해있다. 거동은 물론이고 4음절 이상의 단어조차 내뱉기 힘들 정도로 겨우 연명 중이다. 와타나베는 미도리의 부탁으로 함께 아버지가 입원한 대학 병원에 가게 된다. 졸지에 ‘썸녀’의 아버지를, 그것도 언제 돌아가실지도 모르는 아버지를 만나게 된 것이다. 아버지는 미도리의 거듭된 부탁에도 수프 한 입조차 먹지 않고 산송장처럼 누워만 있다. 지친 미도리는 바람을 쐬러 나가고, 병실에는 서로 초면인 와타나베와 그녀의 아버지만 남는다. 당황스럽고 어색할 법도 한데 와타나베는 미도리의 아버지에게 다정하고도 무던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재잘댄다. 바깥 날씨의 상쾌함, 다림질의 기쁨과 연극 에우리피데스에 나오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에 대해서. 그리고 미도리가 얼마나 좋은 여자인지에 대해서.  한참 재잘대다 배가 고파진 와타나베는 먹을거리를 찾다가 오이와 김과 간장을 발견한다. 김으로 오이를 감아 간장에 찍어 아작아작 먹으면서, 오이가 아주 맛있다고 말한다. 그렇게 오이를 두 개째 먹어 치우고 병상에 누운 미도리의 아버지에게 주스나 차를 마시겠느냐고 물었을 때, 그의 대답은 “오이.”였다. 수프 한 입조차 먹지 않던 그는 맛있다는 말까지 하면서 오이 한 개를 다 먹는다. 그 모습을 보던 와타나베는 미도리의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한다. 

“먹으면서 맛있다는 걸 느끼는 건 좋은 일이에요. 살아있다는 증거 같은 거죠.”

『상실의 시대』 속 여러 장면 중에서 손에 꼽을 만큼 좋아하는 장면이다. 죽음을 앞둔 환자가 누운 회색빛 병실이 서서히 색색의 활기를 띠는 장면. 와타나베의 말을 읽으면서 나도 ‘식욕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생의 증거지.’라고 생각했다. 병문안 가는 사람들이 으레 먹을 걸 챙겨가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미도리의 아버지는 그날로부터 일주일 뒤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떠나는 순간까지 그에게 가장 선명하게 남은 생의 맛은, 분명 오이였을 것이다. 오이를 좋아한다곤 해도 일부러 찾아 먹진 않았는데, 『상실의 시대』를 읽고 나선 입맛이 없을 때 가끔 오이 생각이 난다. 입맛이 없다는 건 무기력하다는 뜻이고, 그러다 보면 어쩐지 생의 의욕마저 시들해지는 기분이 든다. 그럴 땐 거창하고 대단한 일이 아니라, 그저 입맛이나 돋울 수 있어도 충분하다는 걸 와타나베와 미도리 아버지를 통해 배웠다. 씻은 오이를 쌈장이나 간장에 콕 찍어 먹는 일. 오이소박이를 먹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멍하니 앉아서 오이를 아작아작 씹다 보면, 뭔가 더 맛있는 걸 먹어봐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이는 그럴 때 진가를 발휘한다. 누군가가 나에게 “너는 편식은 심하면서, 왜 오이는 잘 먹는 거야?”라고 따져 물을 때, 이제 그럴듯한 대답을 할 수 있다. 오이를 먹으면 식욕이 돌고 생의 활기 같은 게 느껴지거든. 대답을 들은 사람은 뭔 헛소리를 하는 거냐는 표정으로 날 쏘아볼지도 모른다. 그럼 『상실의 시대』 이야기를 찬찬히 해보는 거다. “와타나베가 미도리라는 여자애 아버지를 만나러 병원에 갔는데...”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굳이 오이가 아니어도 상관없는 이야기일 것이다. 누구에게나 미도리 아버지의 오이 같은, 식욕을 돋우고 흐린 눈빛을 맑게 씻어줄 음식이 하나쯤 있으면 좋겠다. 당장 죽고 싶을 만큼 힘들 때도 ‘이것만 먹고 죽자’ 싶은 음식. 먹다 보면 다시 살아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온몸에 퍼지는 그런 음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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